2008. 8. 29. 15:01

나의 식인 룸메이트 :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3 - 이종호 외 9인

나의 식인 룸메이트 - 8점
이종호 외 9인 지음/황금가지



성경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라는 말이 있었던가.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그 세 번째 시리즈, '나의 식인 룸메이트'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머릿속에 언뜻 스친 말이다. 처음 책을 보기시작했을 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이었을까, 이전 작품들보다 재미없는 건 아닌가 싶었서 며칠 손에서 떼놓고 있었는데 웬걸, 후반부로 갈수록 마음에 쏙쏙 드는 작품들이 계속 나타나주시니 '완소'를 외치며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지경에 이르렀달까? (방금 정확한 인용을 위해 검색해보니, 욥기 8장 7절의 의미는 그다지 좋은 의미에서 쓰인 게 아니다. 하지만 본의미를 알았다 하더라도, 나는 읽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좋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이번 공포문학 단편선 세 번째 이야기는 이제까지의 시리즈와는 다르게 특정 한 작품을 표제작으로 내세우고 부제를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으로 붙인 점이 눈에 띈다. 다만 표제작은 신지수씨의 나의 식 룸메이트지만 작가는 대중성 높은 이종호씨를 대표로 내세운 게 배신 아닌 배신감을 안겨준다는 게 흠 아닌 흠으로 보인다.


해설조차도 들어있지 않고 오직 작품만으로도 450페이지에 달하는 막강한 두께를 자랑하는 세 번째 이야기에는 열 명의 작가의 열 명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제까지의 시리즈에서 봐왔던 눈에 익은 작가도, 처음 보는 낯선 작가도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우선 표제작, 나의 식인 룸메이트. 전혀 원치 않는 룸메이트를, 그것도 사람이 아닌, 사람을 식량으로 삼는 괴상한 존재를 룸메이트로 갖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 기대가 컸던 탓일까, 그냥 밍숭맹숭하게 읽혔다. 어쩌면 룸메이트의 존재는 주인공의 무의식의 표출은 아니었을까?

 다음 이야기 장은호의 노랗게 물든 기억. 어린 시절 사소한 실수, 혹은 질투로 친구를 저 세상으로 보낸 사람이 그로 인해 사고를 겪게 되고 그 죄를 평생 짊어지고 사는 이야기다. 어린 나이에 저지른 잘못, 그로 인해 느끼는 죄책감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후반부에 주인공의 모습을 묘사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을 읽으면서 영화 다크나이트의 하비 던트의 모습이 겹쳐졌다고 해버리면 스포일러가 되버리는 셈일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신진오의 공포 인자. 주제 자체에 완전 공감할수는 없지만 소재 선택에 10점 만점에 13점을 주고 싶은 소설. 어느 날 지구를 휩쓰는 공포증. 원인도 치료법도 알 수 없는 이 병은 마치 중세시대의 흑사병 마냥 지구를 잠식해간다. 가벼운 감기 기운으로 시작해서 평소에 자신이 두려워하던 것이 자신을 덮치는 환각 상태에 시달리다가 그 상태를 극복하거나 혹은 환각에 지는 사람들. 환각을 이겨낸 사람들은 가족애를 통해 환각을 이겨낼 수 있었으니 가족의 사랑이란 정말 위대한 것일지도. 개개인이 느끼는 공포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소재로 사용한 부분이 정말 맘에 든다.

어린 시절에 들은 괴담인지 귀신이야기 중에서, 밤에 밖에서 귀신이 자기를 부를 때 거기 대답하면 귀신에 홀려서 죽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우명희의 담쟁이 집을 읽으면서 생각난 것이 바로 그 이야기. 우애가 좋던 자매가 동네의 흉가에 들어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읽는 내내 주인공이 나이에 비해서 너무 조숙한 건 아닌가 싶었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명희"라는 이름 덕에 혼자서 "뭐야, 이 작가 소설에 자기 등장 시킨거야?"이러면서 키득키득 웃으면서 본 소설.

엄성용의 스트레스 해소법. 요즘 늘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살고 있기에 이 사람은 어떻게 스트레스를 푸나 더 눈여겨 봤던 작품. 대형 마트 인테리어 매장에서 일하고 있는 주인공. 성격이 순하고 소심해서 늘 당하고만 사는 그는 스트레스로 미치기 일보 직전.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어느 순간, 그의 머릿속에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귀를 귀울인 그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행동들을 하지만 결국 그 행동들은 그를 파멸시킨다. 사무직이면서도 서비스업에 가까운 직업을 가진 나는 더 끄덕끄덕 하면서 주인공의 스트레스 주범인 일안하는 동료와 진상 고객의 행동에 같이 분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길어서 초반에 집중하기 힘들었던 점이 좀 아쉽다.

한 편의 좀비영화가 생각나는 김준영의 붉은 비. 평소에 길가면서 닭둘기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보면서 "으악"하고 비명을 지르는 나기에 보는 내내 소름이 오소소 돋았던 얘기. 과연, 그 붉은 비의 정체는 정말 뭘까?

보면서도, 보고나서도 너무너무 마음이 아팠던 전건우의 선잠. 반대편에서 돌진해 온 차 때문에 일어난 교통사고, 그 후 사라진 그녀의 존재. 대체 진실은 뭘까? 어디서 얼핏 이런 얘기를 본듯도 한데 그래도 개인적으로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완전 몰입해서 읽어내렸다. 반전이 드러난 후 에필로그로 나오는 그와 그녀의 첫만남. 나도 모르게 "어떡해!!"를 소리내서 말할 정도로 가슴이 너무 저려왔다. 정말 나는 이런 류의 얘기에 약한가보다.

실제 있었던 신문기사를 재구성한 이종호의 은혜. '보험금'얘기와 '여자' 얘기에 어째선지 기시 유스케의 검은집이 생각났다. 사람의 욕심이란 정말 무서운 것 같아서 소름이 돋았던 이야기.

황희의 얼음 폭풍. 예전 벽 곰팡이에서도 미국으로 건너간 가족의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이번 얼음 폭풍도 이민간 가족의 얘기를 하고 있다. 갑자기 쏟아진 폭설로 벌어지는 사건, 그리고 카지노에서 진 빚으로 인해 변해버린 남편. 그 가족의 파멸을 보면서 씁쓸함만이 느껴졌다. 소설의 마지막 문구, '오직 살아있다는 것만이 공포였다.'가 머리에 달라붙어 떠나지 않는다.

마지막 이야기 김종일의 불. 누구나 어린 시절 친구와 했을 법한 비밀 얘기, 그리고 "이거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돼."하는 약속들. 그런 에피소드와 왕따문제, 그리고 자연발화 현상을 결합시켜서 만들어 낸 오싹한 이야기가 김종일의 불이었다. 우명희의 담쟁이 집에서의 주인공과 같이 똑같이 어린 아이가 주인공이지만 불의 주인공이 더 어린아이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타인을 발화시키는 능력의 전이라니, 예전 강풀 만화에서도 저승사자의 능력이 정의되지 않았었던가?


매년 발전하는 모습이 보이는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시리즈. 이번 시리즈에서는 '공포'라는 장르 안에 묶여 있기에는 아쉬운 이야기들이 보였다. 단독으로 나서도 충분히 훌륭한데 장르문학의 옷을 입고 있어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을까 내가 괜시리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구르게 되는 거다.

이제 매년 여름이면 으레 '공포문학단편선'이 나오겠구나 손꼽아 기다리게 됐다. 올해는 바빠서 여름이 다 가고나서야 책을 손에 쥘 수 있었는데 늦게 읽은 게 미안할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내년에는 또 어떤 작가들이 어떤 이야기로 나를 즐겁게 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