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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6.06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
2005. 6. 6. 19:18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

6월 민주 항쟁


1. 6월 항쟁의 발발
   1985년 2·12총선 이후 야당과 재야 세력은 간선제로 선출된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의 도덕성과 정통성의 결여와 비민주성을 비판하면서 줄기차게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였다. 이에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호헌 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대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국은 대결국면으로 치달았다. 6월 10일 전국 18개 도시에서 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 본부가 주최하는 대규모 가두 집회가 열리고,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사상 최대 인원인 100여만 명이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경찰력이 마비되자 정부는 한때 군 투입을 검토하였으나 온건론이 우세하여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으며, 6·29 선언이 발표되었다.

2. 6·29 선언
   1987년 6월 29일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표 노태우가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특별 선언이다.
   주요 내용으로는,
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통한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 이양
② 대통령 선거법 개정을 통한 공정한 경쟁 보장
③ 김대중의 사면 복권과 시국 관련 사범들의 석방
④ 인간 존엄성 존중 및 기본 인권 신장
⑤ 자유 언론의 창달
⑥ 지방 자치 및 교육 자치 실시
⑦ 정당의 건전한 활동 보장
⑧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의 단행 등이 있다.

3. 6월 항쟁의 의의: 6월 민주 항쟁을 계기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민주 헌정 체제로의 복귀가 이루어졌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1. 개요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 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 운동이다.
   발발 당시에는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되었다가 1988년 6공화국 출범 직후 국회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정식 규정되었고, 1988년 11월 사건 규명을 위한 국회 청문회가 개최되었다.

2. 원인
   박정희의 오랜 군사 독재가 통치 능력을 상실하고, 1979년의 신민당 총재 김영삼 제명 파동, 같은 해 10월 16일의 부마 사태,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한 대통령 박정희 시해 사건(10·26사태) 등이 초래한 국가적 위기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 군부가 12·12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고 군사 독재의 연장을 통하여 해결하려 한 데서 비롯되었다. 신 군부 세력이 1980년 5월 17일 비상 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발표하고 민주 인사들을 체포 투옥하기 시작하자 광주에서 공수 부대의 과잉 진압과 이에 반발하는 학생·시민 연대가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났다.

3. 의의
   이 운동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 운동은 1970년대의 지식인 중심의 운동에서 민중 운동으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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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주화 운동








4·19 혁명

 

1. 원인
(1) 이승만 정부의 장기 집권 도모
   - 전후 복구와 민심 수습의 노력
   - 강력한 반공 정책 추진, 북진 통일 추구
   - 자유당 창당 → 개헌 파동, 독재 정치 강화

(2) 사사오입 개헌
   이승만 정권은 1952년 7월에 계엄령 선포 하에서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켰으며, 1954년 11월에는 이른바 사사 오입 개헌을 하였다. 이 사사 오입 개헌은 이승만의 대통령 3선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며, 자유당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국회는 재적 의원 203명 중 202명이 출석하여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7표로 개헌한 부결을 선포하였다. 이것은 개헌안 통과의 3분의 2선인 136명에서 1표가 모자랐기 때문에 부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틀 후에 자유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사사 오입(반올림)의 이론을 내세우면서 가결을 선포하였다.

(3) 3. 15 부정 선거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 이기붕을 정·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한편 야당인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을 정·부통령으로 내세웠다. 그런데 조병옥은 선거 실시 전에 미국에서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4선을 노리는 이승만의 대통령 경쟁자는 없어졌다. 그러나 당시 85세였던 이승만이 노령이었기 때문에 재임 중에 병사하면 이를 승계할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자유당 정권은 집중적이고, 조직적인 부정 선거를 자행하였다. 당시 민심은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부패 때문에 크게 이반되었는데, 자유당 정권은 경찰과 공무원을 동원하여 3. 15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2. 전개: 마산 의거 → 서울 등 중요 도시의 시위 확산 → 계엄령 선포 → 학생·시민의 항거 계속

3. 결과
(1) 이승만 대통령 하야, 자유당 정권 붕괴
(2) 과도 정부의 수립 → 헌법 개정(내각 책임제, 양원제) → 총선거 실시, 민주당 승리(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
(3) 장면 내각의 구성

4. 의의: 학생들과 시민이 중심이 되어 부패 정부를 무너뜨리고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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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기념탑




출처: 동아키드


수많은 민중들의 피가 흘려지고 난 후, 이 땅에 민주주의는 찾아왔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몇백년에 걸쳐서 이뤄낸 것들을 우리나라는 단숨에 해냈습니다

그래서 서양의 제도를 우리나라에 적용시키기 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인가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