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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5. 13. 11:00

반야 - 송은일

반야 1
송은일 지음/문이당

나는 책을 고를 때 은근히 편식이 심한 편이다.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다 읽는 듯 하지만, 한 번 맘에 든 작가는 지속적으로 사랑해주고 한 번 눈에 난 작가는 타인의 평가야 어떻든 내 마음에 안차므로 쳐다도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새로운 작가를 접할 때는 '첫작품'이 주는 느낌이 굉장히 중요하다.
 
솔직히 '송은일'이라는 작가는 처음 접해본 작가였다. 우연한 기회로 이 작가의 '반야'라는 책을 접하게 됐고, 생각도 못한 흡입력에 놀라며 결국 일주일에 나눠봐야지 예상했었던 책을 이틀만에 다 읽고야 말았다. 그 만큼 눈을 못 떼게 하는 뭔가가 이 작가에게, 이 작품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
 
제일 처음 책 제목인 '반야'를 접했을 때 생각났던 건 '반야심경'이었다. 실제 책 내용을 읽어보니 반야심경의 심경이 맞아서 살풋 웃게 됐었다지. 참고로 반야의 늦깎이 여동생의 이름은 '심경'이다:)

그리고 또 반야에 대해서 책을 읽기 전에 알 수 있었던 것은 출판사의 짤막한 소개와 책에 둘러진 띠에 씌인 말들. 조선시대에 인간 대접을 받기 힘들었던 무녀의 얘기를 다룬다 했었다. 소싯적에 접했던 '퇴마록'이나 '무'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무인(巫人)들의 얘기를 본 적은 있지만, 조선시대의 무인 얘기는 또 처음인지라 나름 기대를 하기도 했었다지. 막상 책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자신을 던져 악과 싸우는 피투성이 검투사 무녀 반야"라고 적힌 문구는 사실 날 당황하게 했었다. '응? 무녀얘기라더니? 이 사람이 나중에 무술을 배워서 칼 들고 설치는건가'라는 엉뚱한 생각까지 했을 정도니 말이다. 실제 '검투사'라는 단어 때문에 계속 '검은 언제 배우는거지? 진짜 배우는거야?'라고 생각했지만, 뭐 이런 얘기를 했으면 배우지 않았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으려나, 하핫.


각설하고, 이제 반야에 대한 얘기를 해보도록 하자.

어찌되었든, 위에서 설명한대로 반야는 무인이 천인 취급을 받던 조선시대를 살아갔던 한 여자였다. 그 능력이 너무나도 뛰어났기에 일개 천인들과는 조금은, 아니 아주 많이 다른 삶을 살았으며 그 시대의 다른 여자들과도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던 여자가 반야였다.

이야기는 크게 두 축을 중심으로 해서 돌아간다.
반야 개인에 촛점을 둔 '미타원 식구들'이야기, 그리고 설핏 동학당을 떠올리게 하는 '사신계'이야기. 나중에야 그 둘이 합치되어 하나의 이야기가 되지만, 어쨌든 크게 두 개의 소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반야의 어미인 채정은 참 기구한 삶을 살았던 "여자"다. 누구의 어미니 여자라는 말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작품 속에서 가장 여자의 삶을 살았던 것이 그녀이기에 '여자'를 강조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양가짓 규수로 태어났지만 굴레에서 스스로 뛰쳐나와 무녀의 양녀로 들어가서 무녀를 낳고,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을 데려와 모두 진짜 자신의 아이로 삼기도 하며, 세월이 흘러 어린 시절의 첫사랑과 재회하면서 버렸던 자신의 과거를, 그리고 여자인 자기 자신을 찾게 되는, 자신의 존재로 인해 자식들이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아 자신을 버리게 되는 그런 여자다. 어쩌면 주인공인 반야보다도 훨씬 다채로운 삶을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리고 주인공인 반야,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신내림을 받지 않아도 신기가 있는, 무녀로써의 재능이 있다못해 넘치는 아이였다. 굿을 하는 쪽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점을 보거나 사람의 미래를 내다보고 귀신과 소통하는 그런 무녀. 아무리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가 천시받던 조선시대였지만 민간신앙의 최고봉인 점집 미타원의 주인 꽃각시 보살 반야는 그 뛰어난 능력으로 사람들 입소문을 타다, 나중에 궁궐까지 드나들며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여자를 느끼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여러 남자들과의 인연으로 얽히고 급기야 그것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게 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을 능력의 일부로 사용했을 뿐이지 진정한 여자로 살다가지는 못했다고 보여진다. 소설의 주인공이면 무릇 완벽한 가운데서도 현실적인 맛이 있어야 끌리기 마련인데 그녀에게서는 인간의 매력이 별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완벽해서 더더욱 정이 안가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사신계에 대해서 짤막하게 얘기해야겠다. 아무래도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신계(四神界)'는 작가의 말에 의하면 '현실 속에 살면서도 현실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다. 그 전 시대들에 비하면 완화되었다지만, 그래도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어찌 보면 발칙하고 어찌보연 가엾지만 너무나 대견한, 시대를 앞서가는 비밀결사에 가까운 단체였다.  

책에 있는 사신계 강령을 소개해본다.

사신계 강령(四神界 綱領)

凡人은 有同等自由而以己志로 享生底權利라.
모든 인간은 동등하고 자유로우며 스스로의 삶을 자신의 의지로 가꿀 권리가 있다.

어쩌면 내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조선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가졌던 사상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적이며 이상적이다. 지금이야 민주주의를 강제 주입식으로 교육받아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연히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야 있지만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가당키나 한 소리냔 말이다. 그만큼 인간으로는 당연한 말이지만 시대와 맞지 않는 말이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조용히 자신들만의 조직을 운영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줄거리를 얘기하자면 또 한 없이 길어질테니, 반야의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어야하지 싶다. 읽기는 꽤 재미있게 읽었는게 글로 쓰다보니 딱히 긍정적인 내용은 아닌 것 같아서 조금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책을 읽으면서 세부적인 사항이나 에피소드야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많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그닥 내 맘에 드는 소설은 아니었기에 이렇게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려고 해서 그런 것이었을까, 아니면 뚜렷한 주제 의식 없이 그냥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내가 기대했던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아서 그런 걸수도 있겠지. 슬픈 여자이야기가 보고 싶었는데 예쁘고 유능한 성격 안좋은 여자이야기를 봐버렸으니 말이다.


위에서 반야가 매력없는 인물이라 했는데 정정하고 싶다. '여자'로서의 반야나 '소설' 주인공으로서의 반야는 내게 매력없는 인물이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아, 이거 영화로 만들면 재밌겠다'라는 생각은 계속 들었었기 때문이다. 고로,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어쩌면 매력적인 인물이 반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것 저것 볼거리가 많을 것 같아서일까?


쓰다보니 글이 꽤 길어진 듯 하다. 내가 좋아하는 서정적인 문체도 신파적 내용도 아니고, 뒷통수를 때리는 반전도 없는 그런 소설이었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고 나름 이런저런 생각도 할 수 있게 해주었던 소설로 남지 싶다. 그리고 작가 송은일. 훌륭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녀는 꽤 재능있는 이야기꾼인 것 같으니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