香蓮 2005. 10. 19. 08:41

火...

 

다른 누군가에게 내가 화를 내든,

혹은 다른 누군가가 내게 화를 내든,

어쨌든 별 일 없던 사이가 틀어져 버리는 그런 상황은 정말 달갑지 않다

 

오늘도 속 좁은 나는 정말 별것 아닌 일로 화를 내고 말았다(벌컥 성질이나 부리고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때마침 영화가 시작하는 바람에, 거기다가 영화가 정말 내 취향이 아니었던 바람에 엉뚱한 데 덮어씌우는 격으로 제대로 화가 나고 말았다.)

그 사람도 내가 기분은 좀 상한 거야 짐작했겠지만, 그렇게 정색을 하고 냉랭하게 대해서 많이 당황했을 거다

아니, 실제로 이루 말할 수 없이 당황하며 공황상태에 빠지는 게 보이더라

뭐, 그래도 내 성격을 아는 사람이다 보니 옆에서 괜히 미안하다느니, 왜 화가 났냐는 둥의 얘기로 화를 돋우지는 않고 얌전히 찌그러져 계셨지만(덕분에 지금 나는 미안해서 죽을 지경, 분명히 그 놈이 입을 가볍게 놀려대긴 했지만 이정도로 화를 낼 일은 아니었기에)

 

 

집에 한 시간 가까이 걸어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정말 나는 발전이 없는 인간인가, 어쩔 수 없는 건가

왜 그런 상황에서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미처 다스리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를 여과 없이 드러내 버리는 걸까

 

 

1년 전에 경택이에게 들은 "넌 발전이 없어,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늘 제자리야"라는 말은 그 말을 들은 당시에 내게 큰 충격을 줬었고, 또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지 않을 거라고 부정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듣고 넘긴 척했지만 아직까지도 내 뇌리 깊숙한 곳에 들어앉아서 날 지배하고 있다

큰 트라우마가 되어 버렸다

이젠 일상에서 모든 언행이 두렵기 그지없다, 사람 만나고 대하는 일이 무섭기만 하다

 

누굴 탓하겠는가, 다 내가 자초한 일인 것을

 

 

울화통이 터지고 화병이 나서 죽을 것 같더라도, 그냥 내 감정을 숨기고 내 화를 스스로 다스려야겠다

화를 터트려서 여럿 감정 상하는 것보다야 나 하나 끙끙 앓고 말지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내가 신경 쓰는 건 마찬가지잖아

 

 

나는, 미숙하고, 미숙한, 겁쟁이일 뿐이다